USEFUL OR USELESS 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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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혹는 무용한 글
Useful or Useless Word
이민선
1. 이 시대의 아티스트
88만원 세대, 삼포세대등의 진부한 표현을 차치하고라도 우리가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이 시대는 요컨대 2,30대의 젊은이들을 옥죄는 참으로 살기 어려운 시대이다. 우리는 그가 속해 있는 환경이 어떻든간에, 공통적으로 가난하며 그 가난은 우리 젊은이들로 하여금 그들이 살아가는 시간을 축소시킨다. 그리고 시간의 축소란 심리적 혹은 심정적인 문구로 오늘, 우리의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유용하게 만들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다. 이러한 축소된 시간은 내일, 그리고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생각하는 모든 행위를 속박하여 그것들을 하나의 사치이자 무용함으로 치부해버리곤 한다.
오늘을 사는 이 시대에 아티스트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행하기 짝이 없다. 아티스트가 업으로 삼는 그놈의 ‘작업’이란 심지어 영어로는 그냥 work일 뿐이다. 일. 무슨 일인지, 어떤 일인지, 왜 하는 일인지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은 무책임한 이 작업이라는 행위는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조각 구름 하나를 집어 지구 끝까지 따라다니는 것 같은 한심한 일로 여겨지기 쉽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을 사는 이들은 아티스트라는 그 단어에 대해 ‘팔자 좋은 놈’ ‘한량’ ‘세상모르는 인간’이라 말하며 아티스트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이 시대의 아티스트들은 불행하다. 본인 스스로 ‘팔자 좋은 놈’이라는 요소를 떠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이라는 행위가 지속되고 여전히 예술이라는 것이 통용되는 이유는 그들이 ‘시간의 축소’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들이 쫓는 그 어떤 것을 ‘지금’ 알 수 없을 지라도, 아니, 평생 모를지 몰라도 그들은 그들의 행위를 지속한다. 시간의 축소가 일반화된 이 시대에서 마저도 그들은 바보처럼 길을 만들고, 걸어간다.
2. 최선을 다한 무용함
여기에 한 젊은 아티스트, 김방주가 있다. 그에게 이 시대란 하나의 굴레로서 작용하는 듯 보인다. 그는 그러한 굴레를 피하고자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정착하게 되었고, 굴레의 속박을 최대한 헐겁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자이지만, 어쩔 수 없게도 그가 굴레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소극적인 저항에 그치곤 한다.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그는 끝까지 반기를 들 수 없는데, 그에게 이 시대란 아티스트라는 불안한 직업을 선택한 것에 대한 커다란 죄책감이자, 유용함을 누리며 무용함을 만들어 내는 것(똥만 싸는 기계)에 대한 채무의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부정적인 감흥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그로 하여금 작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드는 듯하다. 그것은 그 스스로 무용함이라고 인정하는 그것이 유용함이 될 수는 없을지언정, 본인의 상실감과 닮아 있는 그 무용함을 솔직하게 표현하기 위함이 아닐까한다. (내가 싼 똥이 내가 먹은 모든 음식물이 다 버무려져 있는 것처럼 솔직한 모습일 때의 쾌감)
이번 ‘Rundgang Staatliche Akademie der Bildenden Kunste Stuttgart 2015’에 선보인 그의 작업 ‘Useful or Useless Form’ 시리즈는 제목 그대로 유용한 혹는 무용한 조각이다. 재활용 봉투에 차곡차곡 쌓은 스티로폼 조각들과 도자기로 캐스팅한 스티로폼 한 조각, 그것이 이 작업의 모습이다. 스티로폼은 가볍다. 스티로폼을 부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것을 부수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이러한 물성으로 인해 스티로폼은 포장재, 단열재로 널리 쓰이며 재활용성도 높다. 세계 곳곳에 퍼져 유용하게 기능하는 물질이다. 도자기는 무겁다. 하지만 한번 놓치면 바로 산산조각이 난다. 도자는 컵이나 그릇으로 만들어져 기능하지만 그외의 형태로 만들어진 도자는 기능적이기 보다는 장식적인 용도로 사용되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Useful or Useless Form’의 도자기로 만들어진 스티로폼은 겉보기엔 전혀 일반 스티로폼과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기능성과 대비되게 전시장 안에서는 오히려 재활용 봉투에 들어 있는 스티로폼은 단지 하나의 쓰레기로, 도자기로 된 조각은 하나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그가 제목에서 사용한 ’Useful’과 ‘Useless’의 단어들은 서로 호환되며 환경에 따라 그 뜻을 교환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유용함’과 ‘무용함’의 경계를 떠도는 듯 한데 그에게 유용함이란 단지 기능되는 유용성이 아니며 무용함 또한 단지 무가치한 무용성이 아니다. 그와 같은 방랑자에게 이 조각을 유용하다며 환호하고 무용하다며 단죄하는 것은 하나의 무심함이며, 이러한 무심함은 그에게 폭력적이다. 유용성 안에서의 무용한 요소, 무용성 안에서의 유용한 요소는 서로 뒤섞여 관람자들은 그들이 쫓아가야 할 하나의 설득력 있는 단서를 잡으려다가 바로 그 설득력을 꺾는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만들어 낸 이 ‘최선을 다한 무용성’의 세계에서, 만약 어떠한 무심함이 이 작업의 요소를 쉽게 파악하여 단정지어 버린다면 이 최선의 세심함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순식간에 무너져 파괴된다.
3. 잘 버리기 위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방주는 ‘잘 버리기 위해서’ 이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말처럼 그의 ‘Useful or Useless Form’을 들여다 보고 있다보면 일종의 무기력함이 느껴지곤 한다. 잘 버리기 위해서. 이 무기력함의 근원은 '예술이 갖고 있는 무용성을 꼬집고 싶다’는 그의 말과 함께 버리는 것을 행하고 있다는 자책에서 비롯되는 듯 하다. 앞서 언급한 시대의 특성을 생각하더라도 계속 시대탓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해서 작업을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잘’ 버리겠다는 하나의 결심을 도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에서 일말의 긍정을 찾아낼 수 있는 이유는 작업의 복합적인 세심함 때문이다. 그가 말한 ‘잘 버린다’는 의미는 말그대로 밖으로 내다버린다는 의미일 수 없기에 이 긍정은 하나의 불씨가 되어 다음 작업으로, 그리고 또 다음 작업으로의 불을 당기는 것이다. 참으로 아티스트는 오늘만 사는 사람일 수 없다. 이 시간까지도 김방주는 작업의 요소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것이고 그 번뇌는 축소된 시간내에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그는 아티스트로서, 바보같은 길을 걸어갈 것이고 나는 그게 참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