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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STATEMENT

2018

 I usually use a strategy to make the film work humorous. In order to do so, I intentionally increase the psychological distance between the audience and the character. Laughter is somewhat malignant. Because laughter has a motive for correction. The development of humorous film is effective in criticising something. In ‘Introduction of Work’, between the artist's narration and work process have a sense of distance that makes laugh. That distance is funny because it shows the artist's poor vanity.

 In this sense, it is important that the artist itself appears in the overall work. The basic structure of laughter is relatively common and attracts people easily. However, the structure created through laughter in my work suddenly becomes distorted. As the character in the latter half of the video, I  exclaim, "Actually, I am directing this film now," and breaks the flow that the audience was immersed in. For example, the last part of ‘One Day_3-4. Jun. 2018’ features a photo taken by a character, which reveals no other than the handy cam that was taking her. The character that has been 'mechanically stiffen' in the work are breathed into life by changes in this structure.

 In short, I intend to transform the character into a subject of empathy, from of laughter, by creating a structure that causes laughter by making myself look foolish in the film, and distorting the structure to reveal the direction.

 본인은 주로 영상 작업을 웃기게 만드는 전략을 사용한다. 그러기 위해서 관객과 등장 인물과의 심리적 거리를 의도적으로 늘인다. 웃음은 어느 정도 악독한 면이 있다. 웃음에 교정의 저의가 있기 때문이다.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영상의 전개는 무언가를 비판하기에 효과적이다.Introduction of Work는 작가의 나레이션과 작업과정의 거리감이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그 거리감이 웃긴 이유는 작가의 어줍잖은 허영을 전면으로 내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반적인 작업에 작가 본인이 직접 등장하는 것은 중요하다. 웃음을 일으키는 기본 구조는 비교적 흔하고 사람들을 쉽게 끌어들인다. 그런데 본인의 작업에서 웃음을 통해 짜여진 구조는 돌연 일그러진다. 영상의 후반부에 등장 인물로서의 본인은 ‘사실 이 영상은 연출된 것이다.’ 라고 외치고, 관객들이 몰입하고 있던 흐름을 깨뜨린다. 예를 들면, One Day_3-4. Jun. 2018 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등장 인물이 찍은 사진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그녀를 찍고 있던 카메라이다. 작업에서 ‘기계적으로 경화’되었던 등장 인물은 구조의 변화로 인해 숨이 불어넣어져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이는 광대가 나오는 작업을 보고 웃고 있었는데 갑자기 영상 속의 광대가 실제로 나타나 어깨동무를 걸었을 때와 같은 당혹감을 불러 일으킨다. 

 요컨대, 본인은 영상에서 스스로를 어리석어 보이게 만듦으로써 웃음을 일으키는 구조를 만들고, 그 구조를 뒤틀어 연출이 드러나게 함으로써 등장 인물을 웃음의 대상이 아닌 공감의 대상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2015 

An usual story.

 

 Like artists often do that, or anyone do that, I am working on myself and a world I am in. So this is an usual statement of the kind. 

 Here is a common world, myself is in there. In this somehow stern and boring world, there is a logic normally being accepted. For instance, ‘Earning more money brings better life.’, ‘Cross the road when the green light is on.’ and ‘It is weird if you are different from the others’ etc. There are rules which could not be always right but broadly used, so these rules are upholding this world by easily spreading to everybody. 

 Also, here is me, myself, an artist. I am somehow average and ordinary person living in this world. However, it is hard to apply those rules in the world to artists. ‘Earning more money brings better life.’, but why are artists doing art? This is problematic, I cannot say anything if you ask like that. It is similar when it comes to the other rules. As a result, artists are often treated as freaks in this world. 

 Accordingly, I and the world around me cannot work in harmony. But ironically, I am still sticking at this world and cannot run away from it. We have no choice but to live together, how can we happily do that? Thus, I am working on suggesting myself some ways to get along with this world. 

 

 The first way is to adjust the world to me. Changing the world by me - the thing like dust - is too difficult. So I am conducting this way by intentionally misunderstanding that the world is just perfectly fit for me. In Superpower, I was a fool in this film. I guessed something in this world has changed because of my supernatural power. This was misunderstanding, but I looked very happy in this film. Similar attempts can be found in the other works, Creator, Word of Object series. (On the contrary, in Nothing to Say, I complained about this world. I said that I am right but the world is not. But actually, I was not sure, so I seemed sad in this work.)

 Secondly, adjusting me to this world. Trying to make an artistic meaning to conduct this way sounds funny. That is like I am not changing but saying ‘I am changing.’ In short, it is a lie. In Introduction of Work in documentary format, I was trying to say I am a typical artist under the rules and the world likes me. This lie was soon detected though in the middle of the film. I also have tried this kind of lie in To Be Honest and it failed as well. 

 

 The problem of those two ways is that it is completely subject to failure. My works are reflecting this as it failed to make a harmony. The important thing is that I just happened to know ‘something is odd’ while I am living in this world, and the starting points are two fundamental questions, ‘Who am I?’, ‘How is this world?’. Therefore, although it does not work well, considering how I and the world can be beautiful each other is what I would like to show, and I ultimately want to expand this idea to the others by working of art.  

 

 예술가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혹은,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는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해오고 있다. 그러니까 이 스테이트먼트는 그렇고 그런 뻔한 이야기이다. 

 여기에 흔한 세계가 있다. 이 세계에는 내가 속해 있다. 다소 딱딱하고 지루해보이는 이 세계에는 어느 정도 통하는 논리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돈을 많이 벌면 좋다.’ , ‘파란 불이 되면 길을 건너자.’ 그리고 ‘남들과 다르면 이상하다.’ 등.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통용되는 룰같은 것이 있고, 생각보다 이 룰은 쉬워서 금방 모두에게 퍼진다. 그리고 그렇게 이 세계를 온전히 유지시킨다.  

 또 여기에 내가 있다. 나. 예술가. 다소 딱딱하고 지루해보이는 나라는 사람은 이 세계에 속해 있는 보통 사람이다. 그런데 예술가에게 이 세계의 룰을 적용시키기는 조금 힘들다. 돈을 많이 벌면 좋은데 왜 예술을 하고 있는가? 그게 문제다. 그렇게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다른 룰에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예술가들은 이 세계에서 괴짜취급을 받는다. 

 이렇듯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는 잘 통하지도 않고 맞지도 않는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나는 여전히 이 세계에 발붙이고 있고, 도망갈 수도 없다. 그저 기묘하게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나는 나랑 친하지 않은 이 세계와 어떻게든 잘 지내보려고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는 작업을 해왔다.  

 

 첫번째는 이 세계를 나에게 맞춰보는 것이다. 나라는 먼지같은 존재가 이 세계를 바꾸는 것, 이 방법은 힘들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이 세계가 나와 맞는다고 의도적으로 오해함으로써 이 방법을 실현한다. <Superpower>에 나오는 나 자신은 바보다. 멋대로 슈퍼 파워라고 착각하는 힘을 발휘하고는 무언가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착각이다. 하지만 이 작업에 나오는 내 모습은 누구보다 행복해보인다. <Creator>, <Word of Object>시리즈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찾아볼 수 있다. (반면에 <Nothing to Say>에 나오는 나는 이 세계에 대해 불평한다. 나는 멀쩡한데, 이 세계가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작업은 서글프다.)

 두번째는 나를 이 세계에 맞춰보는 것이다. 이 방법을 시도해보려고 작업을 한다는 것이, 그럼으로써 어떠한 예술적인 의미를 만들어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 수 있다. 그것은 나를 바꿔볼 거라고 하면서 바꾸지 않는 것이다. 요컨데 거짓말이다. <Introduction of Work>에서 나는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에 맞춰 내가 세상이 생각하는 (룰에 맞는) 전형적인 예술가라고 말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쉽게 밑천을 드러냈다. <To be Honest>에서도 시도해보지만, 투비 어네스트, 안될 일이었다. 

 

 이러한 극복 방안이 안고 있는 문제는 이것들이 어차피 ‘실패할’ 방법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 작업들은 나와 세계와의 조화가 실패한 모습 그대로를 비춘다. 그저 그것을 보여준다. 중요한 점은, 내 자신은 일단 아무 것도 모른 채 삶을 살게 되었는데 (그리고 그건 사실 정말 행운인데) 그렇게 살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은 점을 알아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발점은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있는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라는 기초적인 질문들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최대한 서로 아름다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비록 그것이 잘 안될지라도)이 내가 보여주고 싶은 바이며 또 이러한 걱정과 생각을 나외의 타인에게 확장시켜 나아가는 것이 궁극적으로 작업으로 이루고 싶은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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